많은 분들이 물어보셨습니다.
디자이너 출신으로 어떻게 하반기 매출만
70억 원을 찍는 공장장까지 되었냐고 말이죠.
그 화려했던 모든 시작은,
맨땅에 헤딩하듯 비행기 표 한 장 쥔 채
가난한 현실로부터 도망치듯 중국 대륙으로 건너갔던 2007년, 24살의 그날부터였습니다.
“땅! 땅! 땅! 파산을 허가한다.”
2026년 현재의 저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뒤뚱뒤뚱 보행자에,
나라에서 지정한 기초생활수급자이자 두 아이를 혼자 키우는 한 부모 가장입니다.
몰락한 저를 보며 아버지는
“쓸모없는 놈,
미싱 공장이나 들어가서 옷이나 박아라”라며
모진 말을 뱉으셨죠.
(딸임에도 저는 늘 ‘년’이 아닌 ‘놈’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때 저는 동대문 시장 바닥에서
“언니, 니하오 언니! 신콴(신상품) 있어요!”
를 외치며 손짓 발짓으로 중국 바이어들을 사로잡던
독한 판매자이자 디자이너였습니다.
독기의 시작은,
고작 월급 80만 원을 받던 지독한
‘막내 디자이너’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 월급 80만 원, 15시간 노동…
독기로 버틴 디자이너 막내 시절
처음 패션 디자이너로 발을 디뎠을 때,
저는 디자이너로 출근은 했지만, 사실은 그저
‘시다(보조)’와 다름없는 일이 맡겨졌습니다.
위에 언니들이 시키는 대로 온갖 부자재와 원단을 발주하고, 원단 시장을 이 잡듯 뒤지며 필요한 자재들을 챙기는 궂은일이 제 몫이었죠.
회사의 막내 디자이너일 뿐이었지만,
정말 많은 월급을 받고 싶어서 참 미련할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 시절 선배들의 눈칫밥을 먹으며 무거운 원단과 지퍼 부자재, 쇠단추를 어깨에 메고 동대문 시장 골목을 뛰다 보면, 어느새 다리가 밤마다 코끼리처럼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막내 디자이너인데도 회사 매출을 올려놔야만 제게도 인센티브가 떨어지기에,
생산 일정을 단 하루라도 앞당겨보려고 공장 사장님들을 찾아가 싹싹하게 부탁을 드렸고,
고작 80만 원 받는 제 지갑을 털어 공장에 박카스를 사 들고 다녔습니다.
선배 언니들의 지독한 텃세 속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 15시간 넘게 일했습니다.
하루에 수십 가지 제품의 주문 건이 엄청났거든요.
심지어 유일하게 쉬는 일요일에도 공장에서 급하다며 전화가 오면, 군말 없이 회사로 뛰어가 부자재실 문을 열어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온 정신과 몸을 갈아 넣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도 사장 하고 싶다.
우리 사장님은 맨날 앉아서 돈만 세는데…’
결국 8개월을 버틴 끝에 사장님 방 문을 두드리고…
사표를 내게 되었습니다.
사장님은 깜짝 놀라 왜 그만두냐고 물으셨고,
저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당돌하게 받아쳤습니다.
나: “사장님, 저 여기 그만두고요, 경쟁사 회사에 들어가서 일하고 싶어요. 사표 받아주세요.”
사장님: “뭐? 무슨 소리야? 조금만 더 잘하면 우리가 1등인데, 왜 하필 경쟁사야?”
나: “음.. 제가 경쟁사에 가서 거기 일까지 배우면, 지금 이 회사도 최고지만 제가 최고인 거는 아니잖아요. 하지만 1등 회사를 가면, 제가 최고가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저는 이미 제가 받는 최저 월급에서 주말에도 나와서 일을 하고요, 틈틈이 밤새워 한 청바지 디자인은 언니들이 홀라당 베껴서 마치 자기가 디자인한 것 마냥 컨펌을 받고 인센티브를 타가고 있어요. 그런데 회사는 눈을 감고 있잖아요. 사장님은 다 알면서도 저한테는 그저 버티라고만 하시고요.
하지만, 그 모든 희생의 보상이 고작 몇십만 원인 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제 능력이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경쟁사까지 가서 거기 일까지 다 배우면, 전 정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사장님이 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럴려면요, 저는 그 회사에 가서, 매장에 나가 소비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들이 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서, 그 옷 내가 다 만들어주겠다고요.“
제 당돌하고도 확신에 찬 선언에
사장님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정신이 번쩍 든 사장님은 붙잡을 명분이 없자, 제발 사표 수리를 며칠만 미뤄달라며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저 역시 무작정 도망치듯 나가고 싶진 않았기에,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는 깔끔하게 마치고 가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사장님이 다급하게 저를 사장실로 불러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장님 옆에 웬 풍채 좋은 남성 한 분이 앉아 계시더군요. 바로 사장님 와이프의 오빠, 즉 이 회사의 실질적인 뒷배이자 처남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동대문 의류 업계에서 하루 도매 매출만 1억 원이 넘는, 그야말로 판을 흔드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죠. 제 사직서를 만지작거리며 사장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듯한 그 대단한 양반이, 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빤히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툭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너, 참 당돌하다?
너 그럼… 우리가 시키는 일 한번 제대로 해볼래?
월급은 물론이고, 네가 파는 만큼
인센티브를 아낌없이 줄게.”
2. 하루 매출 2억, 검은 봉지 속 현금 뭉치… 동대문 초호황기
그렇게 저는 막내 디자이너였음에도 불구하고,
처남분의 픽을 받아 처음으로 동대문 도매시장이라는 거친 곳에 나가 손님들과 직접 대면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2006년의 한국 경기는
그야말로 역대급 초호황이었습니다.
중국, 대만, 홍콩 등 아시아계에서 중국어를 구사하는 큰손 바이어들이 한국 동대문 시장으로 몰려와 전 세계로 나갈 옷들을 그야말로 ‘싹쓸이’ 해가던
르네상스 시절이었죠.
바이어 한 명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2,000장, 3,000장씩 오더를 내리는 건
일도 아니었습니다.
매장 창구에서는 카드나 계좌이체 따위는 쓰지도 않았습니다. 전부 시커먼 검은 봉지에 순수 현금 뭉치를 가득 담아 툭툭 던져주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매장의 하루 매출은
기본 1억에서 2억 원을 매일같이 오갔습니다.
2006년 당시에 말이죠.
매일 눈앞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돈의 쓰나미를 보며, 제 가슴 속엔 더 큰 세상에 대한 갈증과 야망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분에 제 나이 고작 23살(2006년)에 월급과
인센티브를 더해 210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돈을 만지게 되었습니다.
2026년 현재 가치로 치면 최소 500만 원에서 600만 원은 족히 되는 대기업 과장급 거금이었습니다.
제 매장도 아닌 회사의 매장이었지만,
그저 돈을 더 벌어서 이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독립해 보겠다고 정말 미친 듯이 질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3. “중국에 가서 중국어를 배워와” 홍콩 손님의 기묘한 제안
그러던 어느 날, 한 홍콩 손님이 통역가를 대동하고
제게 다가와 말을 건넸습니다.
손님: “너 영어도 조금 할 줄 아는 것 같고, 디자이너라면서 왜 여기 나와 있어?
똑똑해 보이는데 내가 만들어 달라는 거 만들어 줄 수 있어?
그럼 중국에 가서 중국어를 배워서 와.
그럼 내가 너한테 제대로 오더(주문)를 줄게. 여기 있어봤자, 쩜순이 밖에 더 하겠지?”
*쩜순이 : 매장에서 판매하는 여자를 가리키는 은어
처음엔 장난인가 싶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 가난한 나라에 내가 왜 가야 하지?’
하지만 꼬리를 문 호기심은 결국 저를 움직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상하이 럭셔리 백화점의 매니저로 가 있던 아는 언니를 만나기 위해 상하이 땅을 밟았을 때,
저는 거대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직접 마주한 상하이는
제가 상상했던 가난한 중국이 아니었습니다.
도로 위를 가득 채운 벤츠와 BMW,
한국보다 훨씬 비싼 식당의 메뉴판…
제가 한국에서 생각했던 부의 기준과 가치가 그곳엔
널려 있었습니다.
‘그래, 결심했어!
가난한 나라인 줄만 알았던 중국에는,
내가 배워야 할 거대한 세상이 있던거야.’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사직서를 던졌습니다.
회사에서는 연봉을 얼마든 맞춰줄 테니 붙잡았지만, 제 마음은 이미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에겐 인생을 바꿀 거대한 자영업이라는
도박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4. 가족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멍에, 그리고 차디찬 베란다 방
중국 의류 산업의 중심지인
‘광저우’의 한 대학교로 어학연수 원서를 접수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을 때,
돌아온 건 아버지의 불호령이었습니다.
“망할 놈의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너 이거 도피야!
아빠는 너 대줄 돈 한 푼도 없으니까
갈 거면 네 돈으로 가! 여자애가 가긴 어딜 가!!”
사실 저희 집은 눈물 나게 가난했습니다.
과거 할아버지의 지독한 도박 중독으로 집안이 부도난 후, 아버지는 중동 사막에서 노가다를 하며 피땀 흘려 돈을 벌어오셨습니다.
하지만 고모할머니를 따라 주식판에 그 돈을 전부 쏟아부었고, 결과는 처참한 파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희 가족은 차디찬 월세방을 전전하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아버지는 가문의 마지막 남은 돈을
5살 터울의 ‘3대 독자 오빠’에게 전부 올인하셨습니다.
오빠의 비싼 연기학원비, 대학 등록금, 추후 안경점을 차려주는 것까지가 우리 집의 당연한 숙제이자 종교였습니다.
반면 저에게 투자할 돈 따위는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오히려 중국으로 떠나겠다는 저에게 이사
보증금이 모자란다며 압박을 가해왔습니다.
“자고로 집안이 안정이 돼야
밖에서도 편안하게 일하는 법이야.
그러니까 이번에 네 돈 좀 쓰자.”
결국 저는 어렵게 모아둔 어학연수 비용 500만 원을 전부 부모님께 내어드렸습니다.
자식의 꿈을 제물로 삼아
가족들은 무사히 이사를 마쳤죠.
하지만 그 대가로 새집에서 제가 얻은 공간은,
일반 화장실보다도 작은, 그저 몸뚱이 하나 겨우 누일 수 있는 ‘차디찬 베란다를 개조한 방’이었습니다.
5. 유명 대학 앞 토크바(Talk Bar)에서 흘린 눈물과 기회
당장 눈앞에 닥친 중국 연수 비용을 다시 모아야 했기에, 저는 눈물을 삼키며 인터넷을 뒤져 단기 알바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한 유명 대학교 바로 앞의 ‘토크바(Talk Bar)’였습니다.
술을 마시고 웃음을 팔아야 하는 음지 같아 겁이 났지만, 절박함이 저를 이끌었습니다.
다행히 순진하고 때 묻지 않은 제 사정을 들은 사장님은 저를 채용해 주셨고, 저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어른들에게 술을 배웠습니다.
체질적으로 알코올 해독이 전혀 안 되는 몸이었지만
돈을 벌어야 했기에 버텼습니다.
매일 밤 캔커피를 돌리며 호객 행위를 했죠.
그곳은 강남 유흥가와 달리 교수, 조교, 엘리트 동문들이 찾는 지적인 명소였습니다.
일하는 스태프들도 전부 내로라하는 명문대생들이었죠. 그 화려한 엘리트들의 무용담 사이로,
어느 날 제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든
단어 하나가 날아와 꽂혔습니다.
손님: “야, 내가 얼마 전에 중국을 다녀왔는데 미쳤다, 걔네들. 이제는 걔네가 전 세계 일등이야. 진짜 싸게 잘 만들어!”
나: “저.. 죄송한데.. 도대체 중국이라는 나라는 왜 가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거기가 왜 일등인가요?”
손님: “음… 한마디로, 황금알을 낳는 닭들을 잔뜩 가둬놓은 거대한 닭장이라고 해야 할까?”
머릿속에 번개가 친 것 같았습니다.
‘아, 유레카…!’
6. 24살의 방황 끝에
드디어 나의 심장이 뜨거워지다
원래는 딱 한 달만 일하고 중국어 학원을 다닌 뒤
출국하려 했지만, 부모님께 드린 500만 원의 공백 때문에 저는 세 달 동안 독한 술을 삼키며 영혼을 갈아 넣어야 했습니다.
‘돈이 많아도
저렇게 꼬장부리는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영혼이 닳아가던 어느 날 밤,
해외 교포 출신 대학원생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제 전공이 패션디자인이라는 말에 한 손님이 눈을 반짝이며 결정적인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우리 집 아르헨티나에서 옷 도매상 하거든?
근데 그 수많은 옷을 다 어디서
떼어오는지 알아? 전부 중국이야!
중국 가면 옷값이 진짜 말도 안 되게 싸.
근데 품질도 나쁘지 않단 말이지.
그냥 중국 옷이 아니라
‘한국 스타일 옷’을 가져와서 아르헨티나에서
엄청나게 마진을 붙여서 파는 거야.
우리 집 쫄딱 망해 가던 집구석이었는데,
엄마가 그 중국 무역 시작하고
돈을 쓸어 담았어.”
쿵-쾅-쿵-쾅
가난한 현실에 부딪혀 꿈을 접고 도망쳐야 할지 치열하게 방황하던 24살의 제 심장이 뜨거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하반기 70억 매출을 찍고 다시 파산을 겪은 지금까지도,
그날 밤 그 손님이 해주었던 이야기는 제 뇌리에 문신처럼 박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한마디를 기점으로,
자그마한 베란다에 몸을 뉘여야 했던 제 가난한 인생은 완전히 통째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5화 예고]
천신만고 끝에 다시 어학연수비를 모아
독기만 품고 도착한 중국 광저우.
하지만 언어도 통하지 않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24살의 여자 디자이너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상 초월의 텃세와 거대한 사기 플랜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대륙에서 생존하며,
’70억 매출’의 발판을 마련했는지,
다음 5화에서 생생한 날것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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